부활절 설교 - 아리마대 요셉의 부활절
부활절 주일 설교 제목 : 아리마대 요셉의 부활절
본문 : 마가복음 15:42~47
서론
요즘 선거철입니다. 여당이건 야당이건 매일 터져 나오는 문제로 홍역을 앓고 있습니다. 당마다 후보들을 공천하면서 정치보스들은 자기 사람을 심으려 애를 씁니다. 언론은 나름대로 셈법을 합니다. 여당에서는 누가 공천 장사를 잘 했나, 누가 이득을 보았나? 야당에서는 어느 세력이 이득을 보았나? 그런 이야기들을 합니다.
오늘 부활절입니다. 부활절에 누가 가장 이득을 보았을까요? 누가 가장 망쳤을까요? 예수님의 부활 수혜자는 당연히 제자들이고, 코가 석자인 이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로마군인들, 배후조종한 제사장그룹, 십자가 처형언도를 내린 총독 빌라도입니다. 지금도 빌라도는 <사도신경>에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어떻게 보면 덤터기를 쓴 것입니다.
예수님 부활로 최고의 수혜자가 된 사람은 12제자보다 오히려 비(非)제자그룹 요셉입니다. 요셉은 아리마대 지역출신입니다. 아리마대. ‘고원’, ‘고지’(高地)란 뜻입니다. 위치는 정확하지 않으나 사무엘의 고향 라마다임 소빔과 동일한 장소로 봅니다(삼상 1:1). 그렇다면 요셉은 유대 국부(國父) 사무엘과 동향입니다. 그만큼 여호와 종교에 대한 성향이 강한 요셉입니다.
1. 무덤을 빌려드린 요셉
마가는 아리마대 요셉을 43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공회'는 산헤드린 공회입니다. 산헤드린은 ‘함께 모여 앉는다’는 뜻으로 이스라엘 최고의 의결기구 내지는 법(法) 집행 기관입니다. 자체 군사력을 보유했고 로마와 무관한 종교적 분쟁에 결정권을 갖습니다.
유대사회에서 공회원, 산헤드린 회원은 법관과 국회의원을 합쳐놓은 굉장한 지위입니다. 로마 원로원보다 더 막강한 지위입니다. 귀족과 제사장, 율법학자들로 구성됩니다. 회원수는 71명으로 제사장 24명 장로 24명, 랍비 학자 22명으로 구성됩니다. 여기에 대제사장은 자동회원으로 의장이 되고 그래서 71명입니다. 지방 의회는 23명으로 구성됩니다.
요셉은 이렇게 막강한 권력기관의 회원입니다. 여기에다 부자이고(마 27:57) 선하고 의로운 사람입니다(눅 23:50). 자기 신념이 뚜렷해서 공회에서 예수님을 죽이자, 결의할 때 찬성하지 않았고(눅 23:51) 뒤에 숨어 조용히 예수님을 따랐습니다(요 19:38). 은닉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숨어 있는 것은 언젠가 드러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받고 따르던 무리들이 흩어질 때 아리마대 요셉은 빌라도 공관에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달라 합니다. 대단한 배짱입니다.
요셉은 예수님 살아생전에는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에게 빵 한 조각 얻어먹은 일도 없고 기적의 현장에도 없었겠지요. 자기 신분을 노출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대인이 두려워⋯ 공회 분란거리, 가십거리가 되는 것을 피한 것입니다. 다만 멀리서, 은밀하게 예수님의 교훈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통해 메시아 왕국을 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덜컥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형당했습니다. 최악의 죽음입니다. 베드로조차 나는 예수 모르오, 발뺌 할 때 요셉은 빌라도 관정에 나타나 예수님의 시신(屍身) 양도를 요구합니다.
마침 같은 공회원 니고데모가 염(殮) 할 때 사용할 기름을 가져왔습니다. 든든한 우군입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의 시신을 염하고 세마포로 싸서 자기가 죽으면 들어가려고 판 새 무덤에 예수님을 매장했습니다. 부자였기에 예루살렘 근처에 매장지를 준비해두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두 종류입니다. 내가 잘 나갈 때는 나타났다가 어려움 당하면 숨어버리는 사람, 교회가 부흥될 때 나타나는 사람과 어려움 당하면 숨어버리는 사람, 좋은 일에는 나타났다가 궂은일에는 숨어버리는 사람! 요셉과 니고데모는 힘들 때 나타나 힘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로 우리교회가 채워지기를 기대합니다. 여기까지는 성경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성경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다음날, 친구가 요셉에게 핀잔을 주었습니다.
“요셉! 너 미쳤어?”
“왜에?”
“비싼 돈을 들여 만든 새무덤을 십자가형을 당한 죄수에게 내주다니…. 미친 짓 아니냐? 지금이 어느 때라고? 네 신분도 생각하고 집안의 명예도 생각해야지⋯ 처신 잘해야 해⋯”
이게 당시 분위기였습니다. 살아있는 예수도 버리고 줄행랑치는 마당에 아무 관계도 없는 죽은 예수를 위해 고급스런 새무덤을 내주고 지금까지 쌓아놓은 명예를 날려버리다니⋯, 누가 봐도 요셉이 크게 판단미스를 한 것입니다. 그러니 미쳤다고, 망령이 났다고 비판하고 걱정하겠지요! 그랬더니, 아리마대 사람 요셉, 별거 아니라는 표정으로 대답합니다.
“괜찮아. 예수님은 주말에만 무덤을 잠깐 쓰고 돌려주겠다고 하셨거든.”
주말이면 토요일 일요일입니다. 이틀만 빌려 쓰겠다! 그래요! 성경에는 없는 대화내용이지만 예수님은 약속을 지키셨습니다. 예수님은 금요일~주일새벽까지 주말(週末)에만 무덤을 빌려 쓰시고 다시 요셉에게 돌려주셨습니다. 훗날, 그 부활의 무덤에 요셉이 묻히게 되었으니… 예수님의 부활에서 가장 ‘수지’ 맞은 사람이 요셉이다,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다.
2. 왜 빌려드렸을까?
죽은 예수님에게 무덤을 빌려드린 요셉은 처음부터 계산적이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다음에 내가 어떤 영광을 얻을 것인가? 결과를 계산하고 내 준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 요셉은 율법에 철저한 사람으로 이익계산에 앞서 율법을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당부합니다(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설령 살인자라도 마지막 명예를 위해서는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무덤에 넣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대제사장을 비롯한 교권주의자들은 방치합니다. 예수님에게 최대한의 모욕과 조롱을 주기위한 증오심 때문입니다. 오히려 빌라도는 내주었습니다. 그는 은근히 바라바를 요구함으로 자기 의사를 거절한 유대교권자들에게 보복하기 위한 심사였을 것입니다.
이에 대해 요셉은, 예수님을 좋아하기도 했지만 율법을 준행하려 총독에게 시신(屍身) 양도를 요구한 것입니다. 이득을 따져보고 보상심리에서 선행을 베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 일을 할 때 요셉과 같은 순수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내가 한 자리 한다, 명예를 한다? 그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하다 보니, 말씀에 준행하려고 열심을 내다보니 이런 행운을 얻게 된 것입니다.
㈁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중심은 무엇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그때부터 요셉은 하나님나라를 기다린 것입니다(눅 23:51). 예수님께서 지상에 이루어낼 천국을 기대한 것입니다. 그는 산헤드린 71명 중의 하나라는 특권이 있습니다. 거기다 부자이고 의인이기에 존경까지 한 몸에 받습니다. 이 정도면 여기가 천국이지요! 뭐가 그리 아쉽다고 하나님나라를 기대하겠어요? 그래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공평하고 평등한 세상! 율법이 제대로 시행되는 나라! 거짓과 불의가 없는 나라! 로마에서 독립된 국가 하나님나라를 소망했습니다.
㈂ 요셉은 죽음 이후에 예수님의 가족으로 함께 있고 싶었습니다.
유대인의 무덤은 삼중적인 구조입니다. 바위를 파내고 무덤을 만듭니다. 무덤을 이루는 외부 면과 그 안의 현관,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납골실로 구성됩니다. 무덤을 이루는 외부의 돌(고랄)은 세상과 무덤을 이어주는 경계선입니다. 유대인은 종교적 신념으로 두 차례의 장례식을 합니다. 1차는 시체를 1년 동안 무덤 안 현관에 보관합니다. 팔레스타인 무더위에 1년쯤 지나면 시신이 해체되어 뼈만 남습니다. 그 썩은 뼈를 모아 납골관에 안장하는 2차 장례식을 합니다. ‘고킴’이라 부르는 납골실은 무덤 안에 있는 또 다른 무덤입니다. 돌을 깎아 뼈를 담은 납골관이 들어갈 정도로 여러 개를 파놓습니다. 그 무덤 속에 가족들이 매장됩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부활까지도 확신했을까요? 확신했다면 3일동안 무덤을 대여한 셈입니다. 부활하든 안하든 예수님 같은 선지자는 없습니다. 예수님 시신을 내 무덤에 모셨다가 뼈가 썩으면 납골당에 넣고 나도 죽으면 그 옆에 있고 싶었을까요? 얼마나 위로가 될까요? 그런 납골당이 있다면 10억씩 내도 예수님 옆자리에 있을 사람들이 대기표를 받고 줄을 설 것입니다.
㈃ 요셉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3차례나 부활을 예고했습니다.
-가이사야 빌립보에서 베드로 신앙고백을 듣고.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만에 살아나야 할 것”(막 8:31)
-갈릴리에서 예고. “인자가⋯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막 9:30).
-예루살렘 마지막 길~여리고에 이르기 전. “⋯그들은 능욕하며 침 뱉으며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니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니라”(막 10:33-34).
요셉은, 부활하신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100% 확신한 것은 아니지만 공회원이라는 최고의 특권과 신분을 내려놓을 각오로 예수 시신을 요구했고 자기무덤에 안치할 정도라면 상당히 많이 예수님의 말씀을 신뢰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요셉은 자기 무덤을 빌려드렸습니다.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는 그런 배짱과 용기가 있나요? 내 인생을 예수님에게 드릴 용기가 있나요? 내 돈과 자녀들과 소유와 명예를 걸고 예수님을 따를 믿음의 배짱이 있나요? 아니면 제자들처럼 힘들면 달아나 버릴 건가요? 자존심 상한다고, 그 일에 내게 손해가 난다고 숨어버릴 것인가요? 그러면 부활의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3. 무덤을 응시하는 요셉
자기 새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치해놓고 요셉은 아무 일이 없는 것처럼 지냈을까요? 그것은 일생일대의 모험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는다면 망신도 이런 개망신이 없습니다. 자기는 아무런 보상도 기대하지 않고 시신을 밤새도록 놔두지 말라는 신명기 율법에 따라 행동했다 항변하겠지만 그는 추락합니다. 그래서 지금 대한민국 선거가 ‘유승민’이라는 한 남자에게 집중하고 있듯이 예수님 못지않게 무덤의 주인 요셉에게 온통 관심이 집중됩니다.
그렇다면 요셉에게 부활은 천국에서 내가 부활 영생체로 살아갈 것인가, 단순한 내세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 운명이 어떻게 될까, 사기꾼에게 속은 선택인가,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세주 부활에 잠시 무덤을 빌려드린 탁월한 선택인가? 그게 결정나는 운명의 주일 새벽 아침입니다.
그러니 어떤 심정이겠어요? 불쌍하게 죽은 예수에게 적선을 해주었다는 심정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무심히 보낼 수 있을까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무덤과 부활여부에 올인합니다.
47절,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보더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습니다. 마태는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27:61), 오직 예수님에게 집중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만 올인합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앉아 있었겠지요.
2박 3일. 숨 막히는 시간. 예수님이 부활하면 종교지도자들이 망신이고 돌에 맞아 죽습니다. 그들은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부활하지 못하면 제자들이 돌에 맞아 죽습니다. 혹세무민(惑世誣民)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2박 3일은 숨이 차고 혀끝이 마르는 시간입니다.
요셉은 더했겠지요? 만약 부활하지 않는다면⋯ 부활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요셉은 충격의 중심에 있습니다. 그래도 부활한다면 훨씬 더 행복한 결과 승리의 행동입니다. 제발~
유대인들은 들짐승이 냄새를 맡고 시신을 훼손하거나 보석이나 귀중품을 노리는 도굴꾼들 때문에 보통 사람의 키만한 돌로 막았습니다. 무덤 입구에는 안내판이 있습니다.
<이 무덤에는 아무 보석도 없다>
<이 무덤을 파헤치는 자에게는 대대로 저주가 내릴 것이다>
그러니 인간 누가 무덤 문을 연다거나 짐승들이 돌을 굴려내는 일은 없습니다. 총독이 직접 지시를 내린 처형이기에 무덤 문에 손을 댈 사람이 없습니다. 견고한 무덤 문을 바라보는 여인들⋯ 특히 요셉에게는 무덤에 누운 사람이 자신이라 착각될 정도로 예민합니다. 그리고 3일이 지난 새벽, 여인들이 먼저 보았고 제자들이 보았고 새무덤의 주인 요셉도 보았습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16:6)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마태복음은 누우셨던 곳을 보라~ 2차 장례를 하려면 앞으로 1년이 있어야 하는데 3일만에 다 썩어서 없어질 일은 없다!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이 문장을 금(金)으로 새기고 싶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이런 역사가 없었습니다. 무덤 문이 얼마나 강한지 모두 알잖아요? 누구도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했고, 무덤은 요셉 소유로 남았습니다. 그러니 자기를 탓하던 친구에게 농담이 나오는 것이지요!
“봐~ 내가 뭐랬어? 예수님은 주말에만 잠깐 쓰고 돌려주겠다고 하셨잖아? 너, 줄 잘 서라?”
결론
자기 무덤을 내드렸던 아리마대 요셉에게 예수님의 부활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이 참이었구나! 하나님께서 구세주로 인정하셨구나! 예수님은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우리 의인됨을 위해 살아나셨다(롬 4:25). 그러니, 예수님 안에서 죄사함과 칭의-양자의 신분을 얻는구나.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기에 우리도 부활하는구나!”
요셉은 믿음의 확신을 갖게 됩니다. 그는 제대로 선택했고 부활의 최대 수혜자가 됩니다. 새무덤이라고 영생을 보증한 것은 아닙니다. 썩는 무덤 드리고 부활 무덤, 영생 무덤을 받은 것입니다. 그에게 죽음은 더 이상 사멸이 아니고 사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무덤! 내가 죽고 아내가 죽고⋯ 우리 아이들이 언젠가는 죽고⋯ 그냥 죽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을 위해 잠시 죽는 것입니다. 그냥 슬픔의 무덤에 묻히는 것이 아닙니다. 찬란한 부활의 무덤에 묻히는 것입니다.
얼마나 행복한 무덤입니까? 부자였기에 새무덤을 금으로 장식한다 한들 부활의 무덤만 하겠습니까? 썩을 무덤 내드리고 부활무덤을 받았으니 부활사건에서 가장 수지맞은 사람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덤조차 드린 일이 없이 부활이 예약되었으니 얼마나 수지맞은 사람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것은 수지맞는 일입니다! 부활로또를 받은 여러분을 축하합니다! 외치세요! 나 로또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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